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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그날의 하루, 오늘의 하루
    일상/글 2025. 6. 29. 11:26

     

    그날의 새벽이 있었기에, 오늘의 아침이 있다.

     

     

    바람이 이상했다.
    6월의 새벽이면 늘 풀잎이 이슬에 젖고, 모깃불을 피우던 아버지의 발끝에서 먼지가 날리곤 했는데,
    그날 새벽의 바람은 뜨겁고도 무거웠다.
    달빛조차 피하려는 듯 흐릿했고,
    멀리 산등성이 너머에서 뭔가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쿵…"
    그리고 몇 초 뒤, 땅을 울리는 포성. 창문이 떨리고, 지붕이 흔들렸다.

    어머니는 이불을 들추며 숨을 삼켰고,
    나는 숨소리조차 들키지 않으려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가장 먼저 아버지가 문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달려오는 군화 소리,
    피난 가방을 쥔 손끝이 떨리고,
    어린 동생은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 품에 안겨 눈을 비볐다.
    “전쟁이야.”

    그 한마디가, 모든 시간을 두 쪽으로 갈랐다.
    전과 후. 기억과 단절. 삶과 죽음.
    우리는 들판을 가로질러 도망쳤다.
    발밑의 흙은 축축했고, 가방끈은 어깨를 파고들었고,
    어머니의 숨소리는 너무 커서 적에게 들킬까 무서울 정도였다.
    어느 마을을 지날 때, 쓰러진 사람 곁에 놓인 운동화 한 짝을 보았다.
    얼굴은 가려져 있었지만, 신발 사이즈로 보아 내 또래였다.
    그날의 아침은 피 냄새와 흙냄새, 그리고 말라붙은 눈물 냄새가 섞인 냄새였다.
    나는 그 냄새를 평생 잊지 못한다.

    오늘 아침,
    모닝커튼 사이로 햇살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아직 식지 않은 커피잔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토스트가 바삭하게 구워지는 소리가 부엌을 채웠다.
    현관 앞에는 택배 상자가 놓여 있고,
    어머니는 강아지에게 밥을 주며 “잘 잤어?” 하고 인사를 건넨다.

    핸드폰을 켜니 날씨 알람이 떴다.
    “오늘도 맑고 화창한 하루가 되겠습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걱정 말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셔츠 단추를 잠근다.
    코끝에 비누 향이 맴돌고,
    라디오에선 DJ가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이 유난히 따뜻하게 들리는 아침.
    나는 불현듯 생각한다.
    내가 누리는 이 조용하고도 평화로운 아침은,
    그날 누군가의 마지막이었던 아침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그분들은 우리를 지켰다.
    총을 들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땀과 피로, 외마디 비명과 맨손의 결기로
    아직 본 적 없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들을 지켰는가?
    그분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
    이 땅의 평화, 이웃의 웃음, 아이들의 안전한 등굣길.
    그 모든 것을 진심으로 지켜내려 했던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기억한다 말하지만,
    그 기억이 때로는 너무 조용하고,
    너무 간단해서 부끄러울 때가 있다.
    국기를 게양하고, 뉴스 헤드라인에 잠깐 나오는 전쟁 사진 몇 장,
    그게 전부가 되어버리는 6월 25일.

    하지만 그날이 어떤 날이었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단 하루만큼은 달라져야 한다.
    단 하루만이라도, 그 정신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한다.

    평화는 그저 흘러드는 시간이 아니다.
    지켜낸 시간이다.
    그리고 지켜내야 할 약속이다.

    나는 오늘 아침, 그날의 바람을 떠올리며 눈을 떴다.
    너무나 고요해서 더 눈물 나는 이 평화 속에서,
    나는 다짐한다.
    이 하루를 당연히 여기지 않겠다고.
    이 하루를 감사히 살아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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