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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라는 역설
    일상/글 2025. 7. 5. 10:50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과연 자유인가, 아니면 소외일까?"라는 물음이 내 앞에 놓였다. 얼핏 들으면 간단해 보이는 이 질문은, 생각할수록 사회/경제/철학의 층위를 따라 끝 모를 심연으로 내려갔다. 그 심연에서 나는 자유와 소외, 노동과 기술, 자본과 시간 사이에 얽힌 보이지 않는 실을 발견했다.

     

    우리는 왜 일을 하는가. 생존 때문이라고 답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먹고살기'이상을 원했다. 누군가는 타인의 인정 속에서, 누군가는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감각 속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스스로 쓸모 있다고 느끼는 순간 속에서 존재를 확인한다. 이런 의미가 붕괴될 때, 사람은 '일이 있고 없음'을 떠나 소외를 경험한다. 그래서 아침마다 출근 전 지친 한숨을 내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일터로 발길을 옮긴다. 일터는 지겨운 의무의 현장인 동시에 "당신은 아직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겨우나마 건네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지금, 100명이 하던 일을 50명이 처리하고도 남을 만큼 생산성은 높아졌다. 이론적으론 모두가 일터에서 해방돼 여유 시간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은 정반대다. 구조조정과 불안정 고용, '더 중요해진 성과 압력'이 남은 50명을 옥죄고, 쫓겨난 50명은 구직 시장을 유랑한다. 남은 이들도 오래 버티기 위해 '가짜 노동'에 손목을 내준다. 보고서를 위해 회의를 만들고, 회의록용 보고서를 적고, 다시 그 보고서를 요약하는 악순환. 자본주의 경쟁 질서는 '여유'를 '낭비'로 규정하고, 잉여 시간을 곧바로 더 높은 목표와 성과로 전환한다. 자유를 약속하던 기술은 통제로 귀결되고, 예측 알고리즘은 사람을 배제하는 도구가 된다.

     

    여기서 드러나는 핵심은 '소유'다. 기술이 누구의 것인지, 시간에 매겨진 값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에 따라 자유와 소외의 경계가 갈린다. 오늘날 시간의 여유는 자본의 여유와 거의 동일어가 되어 버렸다. 누군가는 햇살 속에 요가를 하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소비'하고, 또 누군가는 새벽부터 두 번째 아르바이트를 뛰며 시간을 '저당'잡힌다. 하루는 모두에게 24시간이지만, 자본이 시간 위에 덧씌운 가격표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자본주의 상황에서 자유는 사실상 "살 수 있는"상품이 된다.

     

    그렇다면 기술을 소유한 1%가 자발적으로 시스템을 바꿀 가능성은 희박하다. 지금의 구조는 그들에게 너무나 완벽하게 작동한다. 기술은 불확실성을 줄이고 통제를 자동화하며, 소수의 이익을 더욱 공고히 하도록 설계됐다. '시장에 맡기면 모두가 혜택을 본다'는 사고방식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적 공정성은 비효율에 가깝게 취급된다. 결국 변화는 위에서가 아니라 아래에서, 기술에 배제된 이들의 질문과 연대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기술 자체를 두려워하기보다, 그 기술이 어떤 불균형을 만들어 내는지 구체적인 언어로 들어내고 요구해야 한다. "불공정하다"라는 감정적 외침만으로는 구조를 흔들 수 없다. 알고리즘이 누구를 배제하는지, 자동화가 어떤 노동을 지우는지, 데이터를 통해, 사례를 통해, 집요하게 밝혀낼 때야 권력은 비로소 대답할 의무를 느낀다.

     

    그러나 거대한 구조를 바꾸는 일이 당장 가능하지 않다고 해서, 사고를 멈출 이유는 없다. 생각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한다. "나는 누구를 위한 시간 속에 있는가?", "이 노동은 내 삶을 확장시키는가, 축소시키는가?", "나의 선택이 나의 가치관과 맞닿아 있는가, 아니면 두려움과 타인의 기대에 끌려가는가?". 이 질문들은 거대한 현실 앞에서 작은 발버둥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질문을 품은 사람만이 방향을 잃지 않는다. 가치관을 지킨다는 것은 도덕적 당위 이전에 '자기 서사의 중심'을 놓치지 않는 일이다. 구조가 아무리 매섭게 흔들어도,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기억을 가슴에 붙들고 있으면, 그 기억이 언제라도 나를 다시 밖으로 꺼내 준다.

     

    그래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이런 결론에 다다른다. 지금의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자유일 수도, 소외일 수도 없다. '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다. 자유와 소외를 가르는 진짜 기준은 그 삶 속에 의미 있는 관계와 자율적 선택이 살아 있는가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노동의 양이 아니라, 노동의 진정성이 있는가? 기술이 아닌, 기술 위에 서 있는 인간의 선택권이 확보됐는가? 자본의 안전망을 넘어, 존재 자체를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마련됐는가? 이 질문들이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는 이상, 우리의 자유는 조건부이고, 소외는 항상 발밑을 맴돈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현실 한복판에서도, 질문을 놓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자유의 씨앗을 품고 있다. 그 씨앗은 아직 작고 연약하지만, 생각이 멈추지 않는 한, 글리고 각자의 가치관이 흔들리지 않는 한, 언젠가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곧 자유이며 더 이상 소외되지 않는 삶"이라는 새 문장을 써 내려갈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날을 향해 우리는 질문을 지속한다.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고 어쩌면, 바로 그 끊임없는 사유의 움직임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자유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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